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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윤희순 독립운동가 2019-03-20 12: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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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독립운동가
본관은 해주(海州). 서울 출신. 아버지는 윤익상(尹翼商)이다. 16세 때 고흥유씨(高興柳氏) 유제원(柳濟遠)에게 출가해 유홍석(柳弘錫)의 며느리, 유중교(柳重敎)의 증손부가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강행되자 시아버지인 유홍석이 유중악(柳重岳)·유중락(柳重洛) 등의 춘천 유림과 더불어 이소응(李昭應)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춘천과 가평 일대에서 의병작전을 전개할 때, 윤희순은 「안사람의 의병가」·「병정의 노래」 등 수십 수의 의병가를 지어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직접·간접으로 춘천의병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이 때 춘천의병이 무기의 열세로 적의 공격을 못이겨 유홍석이 재종제인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병(湖左義陣)에 가담하였고 또 유인석과 함께 요동에 갔다가 귀국하는 동안에, 다른 지방에서 온 의병에게 마을 부녀자와 협력하여 밥을 지어주고, 빨래를 해주는 등 의병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그 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이어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한국군대마저 해산되자 각지에 흩어진 해산군에 의해 정미의병이 봉기하였다.

이에 같은 해 8월 유홍석은 족숙인 유중악 등과 모의하고 가정리(柯亭里) 항골[恒谷]에서 유영석(柳寧錫)·유봉석(柳鳳錫)·박화지(朴華芝) 등과 더불어 의병 600명으로 가평 주길리(珠吉里) 등지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 때 의병자금과 탄약·군량이 부족하게 되자 윤희순은 향민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해 여의내골[餘義川谷]주산(周山)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무기와 탄환을 제조, 공급하였다. 한편으로는 의병가를 지어 부르게 하여 의병 훈련을 진작시켰다.

유홍석이 주길리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제천 장담리(長潭里)유중교의 집에 머무르고 치료하면서 의병 재조직을 계획하던 중 1910년 8월 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유홍석이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먼저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후 1911년 윤희순 가족 역시 유홍석을 뒤따라 만주로 들어가서 의병 재거를 도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3년 12월 유홍석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고, 1915년 1월 이미 망명해 온 유인석이 죽었으며, 남편인 유제원 또한 같은 해 10월 회인현(懷仁縣)에서 죽었다.

이에 윤희순은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투쟁하는 윤돈상(尹敦相)·윤민상(尹敏相) 두 아들을 포함한 자손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맏아들인 윤돈상이 윤돈상의 장인 음성국(陰聖國)과 함께 일본경찰에게 잡혀 고문 끝에 1935년 7월 19일 순국하였다.

3대에 걸쳐 의병활동의 뒷바라지를 하던 윤희순는 10여 일 뒤인 8월 1일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과 일생기록을 남기고 향년 76세로 만주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윤희순의 시신은 만주 해성현 묘관둔(海城縣苗官屯) 북산에 장사지냈고, 아직 고향으로 반장(返葬)되지 못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이와 같은 윤희순의 간절한 애국정신과 일생에 걸친 의병활동의 뒷바라지를 추앙해 1982년 11월 9일강원대학교에서 「해주윤씨의적비(海州尹氏義蹟碑)」를 항골마을에 건립하였다. 1983년 8월 3일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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